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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들

블랙머니부터, 개발자의 순리까지

  잠실 자취방에서 여의도까지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시간 동안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보고 싶어 책을 읽고 있는데, 최근엔 그것도 지루해져 넷플릭스 영화를 한 편 봤다. 조진웅 주연의 블랙머니다.

 

 
블랙머니
고발은 의무! 수사는 직진! 할말은 하고 깔 건 깐다! 일명 서울지검 ‘막프로’! 검찰 내에서 거침없이 막 나가는 문제적 검사로 이름을 날리는 ‘양민혁’은 자신이 조사를 담당한 피의자가 자살하는 사건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벼랑 끝에 내몰린다.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내막을 파헤치던 그는 피의자가 대한은행 헐값 매각사건의 중요 증인이었음을 알게 된다. 근거는 의문의 팩스 5장! 자산가치 70조 은행이 1조 7천억원에 넘어간 희대의 사건 앞에서 ‘양민혁’ 검사는 금융감독원, 대형 로펌, 해외펀드 회사가 뒤얽힌 거대한 금융 비리의 실체와 마주하게 되는데… 대한민국 최대의 금융스캔들,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평점
9.1 (2019.11.13 개봉)
감독
정지영
출연
조진웅, 이하늬, 이경영, 강신일, 최덕문, 조한철, 허성태, 윤병희, 서현철, 남명렬, 정민성, 김종태, 노진원, 해리스 제이 버틀립, 크리스티나 마리아 몽고 오로, 이나라, 남문철, 김진구, 김재록, 이승훈, 성병숙, 권소현, 한갑수, 이태형, 윤진영, 우수빈, 이성민, 고인배, 유태오, 문성근, 정인기, 이재용, 류승수, 한담희, 배장수, 선학, 임정민, 김형석, 임채선, 김동규, 강도연, 오진호, 우진혁, 김서하, 박민관, 이가경, 김윤도

 

  주인공 조진웅(이하 양민혁 검사)이 이하늬(이하 김나리 변호사) 와 함께 한국은행을 헐값에 가져가려는 스타펀드의 음모를 막으려는 이야기다. 책 읽기 싫어서 봤는데, 몰입감이 대단했다. 내가 하고 있는 고민과 맞물린 내용이 있어, 조금 잘라와서 써보려 한다.

  검사인 양민혁과 CK로펌의 국제통상 변호사를 맡고 있는 김나리. 성추행 검사라는 양민혁의 첫인상으로 둘은 대립했으나 이내 오해를 풀고 친해지게 된다. 장소는 양민혁 검사 어머님의 횟집. 두 사람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다 양민혁 검사가 증거를 확보하고자 한 행동이 사실 불법 도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김나리가 양민혁에게 왜 불법 도청을 했는지 묻자, 양민혁은 상대가 너무 강하다는 변명과 함께 말을 얼버무린다. 양민혁의 말대로 스타펀드의 규모는 거대했으며 CK로펌은 힘이 강했다. 한국은행 사건의 비리를 고발하는 TV 시사 프로그램은 고위층의 압박으로 방송에 나가지 못하고, 미방영분 영상을 받고자 찾아갔던 방송국은 정식 절차를 받으라는 말로 양민혁을 박대한다. 우산이 되어주었던 총장은 비리 의혹으로 사퇴하고, 국장은 뒷거래로 사리사욕을 채우며 수사를 무마시키려 하는 등 양민혁 검사 혼자 수사를 진행하기엔 벅찼다. 김나리는 양민혁의 답을 듣고, 이해했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시간은 흘러 한국은행 매각 심사일. 심사에 통과하면 한국은행은 스타펀드로 매각된다. 건물 앞은 한국은행 단순 매각을 반대하는 시위가 한창이다. 김나리는 양민혁이 준 결정적인 증거물이 담긴 가방을 가지고 회의실로 들어간다. 하지만 김나리의 차례가 오기 직전, 김나리는 아버지로부터 충격적인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받는다. 내용은 한국은행의 단순 매각이 이루어지면 엄청난 돈이 들어온다는 것. 이 문자를 읽고 김나리는 증거물이 담긴 가방을 들었다 놓길 반복하며 갈등한다. 

 

  김나리의 갈등에 좀 더 공감할 수 있도록 배경지식을 넣어보자. 양민혁과 김나리의 대화 중 김나리가 왜 스타펀드와 일을 시작했는지 언급한 부분이 있다. 어렸을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간 김나리는 미국의 엘리트 층과 같이 공부하며 한국 국력의 한계를 느끼고 보다 힘 있는 강국으로 만들고자 제일 큰 국제통상 로펌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이 거대한 로펌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돈과 힘이 필요했고 이번 매각 사건은 그런 김나리에게 큰 도움이 되어줄 기회였다. 지금 눈을 감으면 애타게 목표하는 거대 로펌을 만들 수 있다.

 

  김나리와 양민혁은 수단의 당위성보다 목적을 더 중요시하는 인물이다. 법을 지키고자 불법을 저지르고, 국위선양을 말하며 나라의 은행을 헐값에 넘긴다. 각자의 이유는 다르지만, 생각은 똑같다. 이와 비슷한 다른 인물도 살펴보자. Netflix 드라마 보좌관에서 이정재가 연기한 장태준 보좌관이다.

 

그러니까 국회를 가면 이정재와 신민아 같은 분이 계신다는거죠?

  힘없는 무소속 이성민 의원은 예전 자신이 가르치던 장태준 보좌관의 실수로 인해 법무부 장관을 준비하는 송희섭 의원에게 공격을 받게 된다. 장태준은 자신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며, 이성민 의원에게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가만히 있을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이성민 의원은 그런 장태준에게 한 가지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는데, 사실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장태준 보좌관은 정치 자금이 부족한 이성민 의원을 위해 경쟁 후보를 후원하는 단체를 수사 목록에서 제외시켜주는 조건으로 후원자금을 받았다. 이를 이성민 의원에게 보고하지 않았고 자신만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이성민 의원은 사실 장태준의 행동을 알고 있었으며,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고백을 마지막으로 이성민 의원은 삶을 끝낸다. 

 

  두 인물 모두 이런 결말은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운이 좀 더 좋아서, 만약 양민혁 검사가 불법 수사를 한 것을 들키지 않았더라면, 장태준 보좌관의 봐주기 수사가 들키지 않았더라면 모두가 생각하는 해피엔딩을 만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결말은 배드 엔딩이며, 이야기가 아닌 현실에 사는 우리들은 운이 좋을지 미래를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상황이 왔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을까? 회사에서 일하다 보면 비슷한 순간이 찾아온다. 자율주행 카메라를 개발하는데 고양이도 사람으로 인식해 멈춘다던지, 서비스를 개발했는데 내가 생각하지 못한 버그로 인해 작동하는 기능이 생기는 등의 경우다. 양민혁 검사, 장태준 보좌관이라면 여기서 타협하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나도 동일한 선택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 순리라는 단어(방식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를 배우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순리의 사전적 정의는 도리 혹은 이치에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단순히 뜻만 보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고 절대 틀릴 수 없는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순리에 따르는 행위 자체보다 순리를 정의하는 방법과 그 이유다.

 

출처: 네이버 사전 (krdic.naver.com)

 

  여기서 순리는 "기능"을 기능으로 보지 않고 버그로 정의하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버그가 우연히 기능이 되었을 뿐, 그것은 버그이고 우리가 고쳐야 할 이슈 중 하나다. 따라서 순리를 따른다는 것은 이 버그를 제거하고 기능을 추가 개발하는 것이다. 리소스에 쫓기는 개발자들은 당연히 선택하기 어려운 의사결정 방식이다. 왜 작동하는 것을 굳이 고쳐야 하는지, 그냥 넘어가면 기능이 될 텐데? 아니다. 이건 기능이 아니라, 기술 부채다. 앞으로의 의사결정에서 이런 기술 부채를 추가로 고민해야 하기에 일정 설계에도 어려움을 겪고, 버그가 더 이상 기능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어떤 형태로 찾아올지도 파악이 어렵다. 그러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역의 고민을 그만두고. 가장 간단하게 일하자는 거다.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코드의 행동은 버그이며 버그는 기능이 아니다. 우리가 개발한 것과 개발하지 않은 것을 명확히 하자.

 

  비단 기술적 의사결정뿐만 아니라 주말근무, 야근도 마찬가지다. 이번 일정만 지키자는 생각으로 저녁과 주말 없이 일하게 되면 지금 당장의 일정은 지킬 수 있겠지만 점점 개인의 평균 퍼포먼스는 줄어든다. 반복되면 번아웃까지 찾아오고 더 이상 프로젝트 성공 여부는 우선순위가 아니게 된다. 그러니 타협하지 말자. 우리가 의도했던 결과만 생각하자. 그게 순리의 기본 원칙이다.

 

  드라마 보좌관에서 이성민 의원은 장태준에게 말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세상에 순응하기 시작하면, 결국 목적은 사라진다." 목적이 없는 수단은 결국 목적을 바꿀 것이다. 결국 목적과 수단은 상호보완적 관계가 아니다. 지금 당장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역리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남는 것은 우리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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